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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의 역사

낙농의 기원

인류 역사상 수렵시대에서 경작시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소가 가축화되면서 우유가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인류가 이용한 가장 간단한 형태의 유제품은 우리가 마시는 흰색우유일 것이다. 우유는 운반도중 쉽게 부패되기 때문에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대에는 소나 양을 도심지로 끌고 와서 현장에서 착유하여 판매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우유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기원전 우유역사

가장 오래된 기록

B.C. 3500년경의 것으로 인정되는 유프라테스(euphrates)계곡 근처 Al’Ubaid에서 발견된 벽화이다. 1922년 대영 박물관과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박물관의 연구진에 의해 발견된 이 벽화에는 외양간에 매어 있는 소, 젖을 짜 는 사람모습, 젖을 걸러내어 그릇에 받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성경 및 경전기록

B.C. 3000년 이전에 기록된 성경에도 가나안(Canaan : 오늘날 팔레스타인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우유에 대해서 수없이 언급되었으며, B.C. 600년경 인도 베다(Veda) 경전에도 석가모니(부처님)가 우유와 꿀로 만든 유미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기록

B.C. 2000년경 앗시리아 시대에는 가축 떼와 병사를 그린 벽화가 발견되는 등으로 보아 인류가 가축 및 그 우유를 이용한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는 우유와 치즈, 버터를 고급식품으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B.C. 400년경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우유는 가장 완전한 식품”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우유역사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소를 가축으로 사육하고 식용이나 제물로 이용한 역사는 단군조선(B.C.1500년경) 이전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우유를 이용한 구체적인 기록은 1285년경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농축유제품을 의미하는 낙(酪)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그리고 일본의 문헌에는 6세기경인 고구려 평원왕때 복상(福常)이 유락을 만들었고 이를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우왕때 국가상설기관으로 “유우소(乳牛所)”라는 목장을 설치하여 왕실과 귀족 등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 우유를 먹을 수 있었

조선시대

조선 순조(純祖)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세시풍속서인 동국세시기 내의원에서는 우유를 식품으로 만들어 임금과 신하에게 준 내용과 “불전열반경성행품”에는 우유를 환자에게 먹이도록 한 내용이 있다. 세종때 “유우소(乳牛所)” 규모가 커지자 이의 폐단을 막고자 유우소를 폐지하였다. 숙종 때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왕이 특별히 하사한 낙죽(우유죽)이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하여 낙죽(우유죽)은 보양식으로 왕이나 일부 귀족층만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다. 이와 같이 우유가 대중화 되지 못하다 1902년 구한말 (舊韓末) 농상공부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Short가 홀스타인 젖소를 도입함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근대의 낙농업

낙농업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국에서도 이미 고대체 우유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말기에 우유는 고대 왕실과 귀족들의 병을 고치는 약용으로 이용되었고 보약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낙농은 1900년대부터 시작

한국에 우유가 일반에게 보급된 것은 지금부터 약 100년 전부터이다. 젖소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02년으로서 한말 농상공부 기사로 근무하던 프랑스인 쇼트가 젖소를 들여와 목장을 시작한 것이 한국낙농의 시초이다. 그후 젖소는 해마다 증가하여 1913년에 전체 젖소는 678두에 이르렀다. 1924년 목장에서 생산된 우유를 끓여 판매하였으며, 1937년 시유가 산업적 으로 최초 생산되었다. 사육두수가 점차 늘고 있었던 젖소 두수는 6.25전쟁 이후 크게 감소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국민소득의 향상과 함께 우유의 생산과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유제품의 종류는 더욱 다양화되어 유산균 발효유, 유지방의 농축식품인 버터, 고단백질식품인 치즈, 아이스크림이 개발되었다. 여기에는 유제품의 생산시설 도입지원, 수급조절용을 제외한 유제품의 수입금지 등 정부의 낙농진흥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


1960년대 시유 소비 안정, 1970년대와 1980년대 들어 우유 소비 늘어나

한국의 낙농은 1962년 뉴질랜드에서 매년 젖소를 들여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경기 안성에 한독목장이 설립되어 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시유 소비가 안정적으로 증가했고 연유와 분유의 생산 기반이 이루어져 우유의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국민소득의 향상과 함께 우유의 생산과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유제품의 종류는 더욱 다양화되어 유산균 발효유, 유지방의 농축식품인 버터, 고단백질식품인 치즈, 아이스크림이 개발되었다. 여기에는 유제품의 생산시설 도입지원, 수급조절용을 제외한 유제품의 수입금지 등 정부의 낙농진흥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


체위향상에 큰 도움 준 학교우유급식

또한 1980년 9월부터 학교급식제도가 실시되어 1993년에는 정부의 보조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1일 평균 347만 6천 명의 학생들이 우유급식을 받았다. 학교 우유급식은 성장기 아동들의 체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94년 현재 전국에 51개소의 우유처리가공장이 있는데 우유생산자가 우유의 생산, 가공 및 판매까지 담당하는 협동조합과 우유의 가공과 판매에만 주력하는 기업으로 양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 목장은 주로 경기, 충청 지역에 많이 분포

연간 한국의 우유생산량은 185만 8929t이고, 1인당 우유소비량은 연간 45ℓ이다. 낙농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30년 전과 비교할 때 우유의 1인당 소비량은 100배 가량 증가했으나 아직 낙농선진국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생산되는 주요 유제품을 보면 마시는 우유(시유)에는 백색시유와 가공시유가 있고, 분유에는 조제분유 ·전지분유 ·탈지분유가 있다.

치즈는 자연치즈와 가공치즈가 생산되고 유산균 발효유는 호상(糊狀)과 액상(液狀)의 형태로 생산된다. 한국의 젖소는 서울 ·경기 ·충청 지방의 대도시 근교에서 많이 사육되고, 부산 ·영남 ·호남 ·강원 지방에는 다소 적게 분포되어 있다. 젖소는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풀(조사료)을 급여해야 하나 젖소 1두당 약 1정보의 초지가 필요하므로 도시근교형 낙농에서는 지가(地價)가 높아 풀생산이 어려운 실정이다. 전국토의 68%가 산지인 한국에서는 경사도가 낮은 산지를 개발하여 조사료를 생산하면 국토의 효율적 이용 및 낙농분야의 발전을 더욱 높일 수 있다.